한방에 훅 갔다 by 꿀풀

10월에 다녀온 부여의 대백제전때 본 하늘. 

전기장판을 침대위에 쩔쩔끓게 해놓고
엄마가 호주갔다가 공수해온 두께 10cm 양털이불을 코위에까지 뒤집어쓰고 자도
얼음같이 찬 내 발과 내 손은 새벽까지도 녹지를 않는다.
내 찬 왼발이 내 오른다리에 닿거나 내 찬 오른손이 내 얼굴에 닿으면서 
그 차가움에 놀라 저절로 잠에서 깨어나는 겨울이 돌아온 것이다. ㅠㅠ
열선 양말과 열선 장갑이 한번 시판될만 하거늘 도대체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
춥다 추워

난 뭐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열흘간의 입원생활을 끝내고 막 퇴원했다.
펑크족처럼 귀뒷머리를 민다음
어딘지 잘 모르겠는 어느 부위의 피부를 조금 잘라 뚫린 고막에 이식해 얼추 구멍을 막았다.
중이염으로 생긴 뼈염증을 치료하기 위해 뒷머리를 쪼개고(!) 뼈도 좀 깎아줬다. --;;;

난생 처음 입원해봤고(그나저나 입원복은 정말 핏이 안살더군.)
난생 처음 전신마취도 해봤다.
드라마에서 가끔 봤던것처럼 머리엔 파마수건같은 거 뒤집어 쓰고 바퀴달린 침대에 실려 들어가며
수술실 여닫이 문앞에서 손흔들며 눈물의 이별도 해봤다. (뭐 난 늘 오바인생이니..)
살다보니 이런 생소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는 날도 오더군.

생명에 지장없는 수술인데도 
수술동의서(시신경 손상, 안면근육 마비..이런 휴유증 써있었음) 쓰는데 완전 착잡하고
수술전날 저녁에 미장원가서 옆머리 미는데  눈물이 한줄기 흘렀다.
좀 부크럽군하.

성공확률 얼마안되는 수술 하러 들어가는 거면 어떻겠나, 그 심정은 감히 가늠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술 이틀전에 후배 윤갱이를 만나 유언도 했다..--;;;
공증받지 않는 유언은 법적 효력이 없다는 이야기도 나눴지만,
뭐 내 유언으로 가족간 분쟁이 일어나지야 않겠지, 하고 그냥 말로 유언했다.
윤갱이도 진지하게 들었다.

수술실에 누웠는데 
의사같은 사람들 대여섯이 내려다보는 와중에 한 명이 플라스틱 마스크같은 것을 들고 있길래
아,저게 씌워지면 마취되나보다, 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것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왠걸, 그 마스크랑 무관하게 
갑자기 뜨거운 불덩어리가 뱃속에서 목구멍으로 무서운 속도로 솟구치더니 한방에 훅 꼴까닥 기절이..ㅋㅋ

깨어날때는
외계인이 공중부양시켜놓고 빙글빙글 돌리면서 UFO로 납치해가는 기분이 들어서
비몽사몽간이었지만 여기 있어야돼, 가면 안돼, 이런 말을 중얼거린 듯 하다.
뭔가 알수는 없지만 돌이킬 수 없는 굉장히 나쁜 일이 일어난 거 같아서 치를 떨었던 거 같기도 하고..

이후로는
진통제와 항생제, 혈행개선제, 수면제, 가래제거제, 포도당 등등 다양한 팩과 병, 캡슐의 주사제를 양 팔뚝에 멍이들게 맞았다.
악명높은 병원밥 싱거움의 실체도 잘 알게 됐다.
영양사앞으로 천일염 한포대를 인터넷 주문해서 패대기를 쳐주고 싶었다.
심히 비루한 열흘간의 식생활에도 불구하고 살은 빠지지 않았다.
먹지 않아도 살은 안빠지다니 영양사가 능력자로세.

회사에서는 병가간다고, 낮잠도 원없이 자게 됐다고 부러움을 한몸에 받았으나
입원내내 정작 잠은 거의 못잤다.
(난 원래 잠은 별로 없는 인간이다.
불면증도 자주 걸리고.
올 5월에 워싱턴 출장가면서 비행 13시간 30분동안 단 5분도 자지 않았던 나다.)
침대도 너무 딱딱하고, 간호사 스테이션과 너무 가까와 밤에도 전혀 조용하지 않았다.
불빛도 문틈으로 새어나오고.
숙면은 개뿔.

열흘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두세시에 기상해서
머리와 귀를 붕대로 칭칭 동여맨 전쟁부상병 꼴을 하고 링겔걸이를 밀면서  스르륵 스스륵 유령처럼 병원복도를 서성댔다.
유리창에 코를 대고 싸늘한 서울 야경을 내려다보는데
아, 인생 드럽게 외롭네, 소리가 절로 중얼중얼.
겨울은 다 좋은데 이런 기분 들게 하는 게 나빠,
다음 생이 있는 거라면,
그리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면 절대 다시 태어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도.

참참, 수술후 사흘동안은 누워서 자면 안된다고 해서 밥상펴놓고 앞으로 엎어져 있느라 허리 부러질 뻔..ㅠㅠ

서너시간 자는 시간과 밥먹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책읽는데만 썼더니
퇴원하고 집에 오는데 시력이 급격히 떨어진 게 실감나서 너무 놀랐다.
더 나빠지면 안되는데.
입원전엔 흐리게나마 읽을 수 있던 간판들을 퇴원하고 가는 길엔 거의 읽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거리로 나선 거라서 좀 어질어질한 탓도 있었던 거 같고.




덧글

  • tirol 2010/11/18 18:19 # 삭제 답글

    그런 일이 있었군요.
    수술 후 몸조리 잘 하셔요.

  • 꿀풀 2010/11/19 00:28 #

    OK.
    몸보다 마음을 챙겨야할듯.
    애 낳고 온 것도 아닌데 우울증..ㅋㅋ
  • 제시카 2010/11/20 14:05 # 삭제 답글

    천일염 한포대 패대기 우하하핫
    누워있으면서도 저 정도 유머를 생각해내시다니
    참으로 아까운 재능이 아니옵니까!
    어서 등원을 하시지요.
    책을 내라 이 말씀이옵니다.
    한비야 능가할 것이옵니다.
  • 꿀풀 2010/11/21 11:24 #

    왜 자꾸 책내라는 거냐
    자비출간하고 빚더미에 앉는 게 보고싶냐

    오른귀에 한달동안 심지를 꽂고 살아야 해서 진정 장애체험을 하고 있어..ㅠㅠ
    오른쪽에 핸드폰을 놓고도 왼쪽귀로만 벨소리가 들리는 탓에 핸드폰이 왼편에 있는줄 알고 왼쪽에서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곤한다.
  • 정보살 2010/12/14 10:09 # 삭제 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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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인생 드럽게 외롭네, 소리가 절로 중얼중얼.
    겨울은 다 좋은데 이런 기분 들게 하는 게 나빠,
    다음 생이 있는 거라면,
    그리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거라면 절대 다시 태어나지 않아야겠다는 결심도.
    ---------------------------------------------------------------------------

    이 부분 읽으면서 "그래 애는 낳아서 뭐하냐... 이런소리 할텐데..." 라며 알수 없는 동의를 하고 있음!!!!!
  • 꿀풀 2010/12/14 13:35 #

    인생 드럽게 외로운 것은
    자식과 아무 상관관계없는 듯.
    누구 덕분에 덜어지지도 않고, 누구때문에 더해지지도 않고.

    '애는 낳아서 뭐하냐, 이런 소릴 할텐데'는
    너가 애를 낳아도 이런 소리를 할 거라는 말이냐,
    너가 낳은 애도 이런 소리를 할 거라는 거냐?
    전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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